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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1. 15 (17:17)
subject : 국립발레단 10월 정기공연
name    : chacottkorea visit : 5741
지난 토요일 국립발레단의 정기공연을 보러 가게 된 건, 우연히 본 신문기사 덕분이었다. 70년 전쯤에 러시아의 유명한 안무가 미하일 포킨 Michel Fokine 이 “춘향전”을 소재로 해서 만든 발레가 있었고, 그것을 국립발레단이 복원해서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었다! “빈사의 백조”와 “불새”를 만든 그 전설의 안무가가, 한국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의 고전을 가지고 발레를 만들었다니... 정말 듣기만 해도 설레는 일이었다. 한국문화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때라 의상과 무대가 중국풍으로 설정되었고 (아래 옛날 공연 사진들을 보시라) 내용도 원작과 많이 다르다지만, 그 점이 오히려 더 흥미를 끌기도 했다. 그래서 단숨에 온라인으로 티켓를 샀다 - 같이 공연된다는 “뮤자게트”라는 작품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로 말이다.







공연 날,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 기대에 부풀어 앉아 있으려니까, 막이 오르는데.. 어? 아름드리 나무가 우거진 숲을 배경으로 등에 투명한 날개를 달고 하얀 긴 발레복 튀튀 로망티크 Tutu Romantique 를 입은 요정들이 줄지어 나오는 거다. 그제서야 이 공연에 “레 실피드 Les Sylphides (공기의 요정들)” 도 포함되어 있다는 게 생각이 났다. “춘향”에만 신경을 쓰는 바람에 그걸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사진으로만 보았던 "레 실피드"를 직접 보게 되니 좋은 기회였다.








이 단막 발레 역시 포킨이 안무했는데, 특이하게도 아무런 줄거리가 없다. 오케스트라용으로 편곡된 감미로운 쇼팽의 피아노곡들을 깔고, 많은 요정들이 조형적인 군무를 보여주고 세 명의 중요한 요정들과 한 명의 남성이 독무나 2인무 등을 보여주는 것 뿐이다. 즉 어떤 극적인 것이 완전히 배제된, 오로지 춤의 순수한 아름다움만을 보여주기 위한 작품인 것이다. 무대나 무용수들의 복장은 전통적이지만, 굉장히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림으로 치자면... 휘슬러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 가 그렸던 여인의 초상화들 비슷한 발레라고나 할까? 그의 초상화들은 얼핏 보기에 파격적일 것이 없지만 제목이 “아무개의 초상화”가 아니라 “살색과 핑크색의 심포니” 이런 식이다. 즉 그림의 소재보다 그림의 색깔이나 톤의 조화가 주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보라는, 추상화의 선조격이 되는 그림들이다. “레 실피드”도 바로 그런 발레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본 “레 실피드”에는 국립발레단의 스타 김주원이 출연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왜 스타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동작이 물 흐르는 듯 하면서도 절도가 있고 흔들림 없이 아름다웠다. 그간 시끄러운 일로 마음 고생이 심했을 텐데, 좋은 공연을 보여주어서 고마웠다. 유일한 남성 무용수로 나온 김현웅도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레 실피드"는 끝나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춘향 - 사랑의 시련"이 시작됐다. 흠, 그런데, 시작부터 한 떼의 원숭이들이 나오는 게 심상치 않았다. 중국풍으로 만들었다더니 정말 심하게 중국풍인가 보네... 춘향의 아버지인 만다린(맙소사, 만다린이라니)이 원숭이들을 쫓는 장면에서는 갑자기 작년에 대유행하던 조삼모사 패러디 만화가 생각나서 혼자 쿡 웃고 말았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은 고개를 인형처럼 까딱거리며 인사하는 동네 처녀들, 그 다음에는 "호두까기 인형"에서 손가락을 들고 춤추던 중국 인형들과 비슷한 춤을 추는 춘향(김주원)... 정말 철저히 중국풍, 아니 서양인이 중국풍이라고 생각한, 그런 다소 우스꽝스러운 안무의 연속이었다. 그 중에서도 춘향의 연인(김현웅) - 이몽룡이라고 해야하나? - 의 춤은 좀 황당할 정도였다. “레 실피드”의 그 섬세하고 우아한 안무를 한 포킨의 안무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화끈하게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코믹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야기도 “춘향전”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내용이다. 만다린은 부유한 중국 사신에게 춘향을 시집 보내려고 한다. 춘향은 이미 사랑하는 청년이 있기에 거부하지만, 욕심 많은 아버지는 딸을 사신에게 떠민다. 사신이 춘향에게 추근거리고 있을 때 춘향의 연인이 용으로 변장하고 나타나서 쫓아버리고, 친구들과 함께 사신의 재물도 빼앗는다. 사신이 빈털터리가 된 걸 보고 만다린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춘향이 연인과 혼인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자 청년은 사신에게 재물을 돌려주고, 그것을 보고 만다린은 다시 사신에게 달라붙지만, 사신은 만다린이 자신의 돈만 탐낸다는 사실을 알고 떠나버린다. 만다린은 울며 겨자먹기로 춘향과 연인의 행복한 혼인을 지켜본다는 내용이다. 포킨의 원래 발레에서는 중국 사신이 아니라 서양 대사로 설정되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이 발레가 정말로 한국의 "춘향전"을 바탕으로 한 건지조차 의심이 가게 되는데, 여러 문헌을 보면 그건 맞다고 한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 귤이 유럽으로 가면 오렌지도 아니고 아예 서양배가 되는구나... 전반적으로 생경한 느낌이 강했던, 그러나 그것이 나름대로 재미있기도 했던 공연이었다. 그리고 국립발레단은 이번 공연에서 안무는 그대로 복원하면서, 중국풍 의상과 무대는 한국식으로 바꾸었는데, 그렇게 하니까 오히려 생경하고 모순된 느낌이 더 강화된 것 같다. (한복을 입고 호두까기 인형 중국의 춤을 추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어쨌든 그 시도도 나쁘진 않았는데, 시비를 좀 걸자면 춘향의 의상과 무대 배경이 거슬렸다. 그냥 한복 고유의 원색적 색감을 살리는 게 나았을텐데 어색한 핑크-보라의 파스텔 색조로 촌스러운 느낌이 들고 (누구는 북조선 무용단 같다고 하더군), 배경의 일월곤륜도도 따로 노는 느낌이었다. 뭐, 이 발레 자체가 주는 어색한 느낌을 강화하고자 그랬다면 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20세기 초 러시아 출신의 안무가가 한국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한국의 고전을 색다르게 - 너무나 색달라서 본래 색을 알아볼 수 없게 - 변형해서 만든 작품을 본다는 건,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고 문화사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작품 자체가 그렇게 아름답거나 재미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솔직히 다시 볼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이날 공연의 진정한 메인디시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마지막에 상연된 "뮤자게트 Musagete"였다. 현존하는 명 안무가들 중 하나인 에이프만 Boris Eifman 이 80년대에 사망한 명 안무가 발란신 (밸런친 George Balanchine 1904-1983) 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작품으로, 아시아에서는 이번에 최초로 공연되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 "춘향"에만 관심이 쏠려 있었기에 이런 것들도 공연 직전에 팸플릿을 보고 알았다. 그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이 발레를 보기 시작했는데, 아니 그래서 더 그랬는지는 몰라도, 시작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으며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발레는 극도로 미니멀한 무대에서 노쇠한 발란신이 바퀴의자에 앉아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기 사진들에서는 김현웅이 발란신을 연기하고 있는데, 내가 본 토요일 공연에서는 장운규가 발란신을 연기했다. 곧 그의 뒤로 발레 연습실 - 연습할 때 붙잡는 바 하나로 상징되는 - 과 연습하는 무용수들이 나타난다. 연습 동작 하나하나가, 그리고 발란신이 무용수들을 지도하는 동작 하나하나가 그렇게 멋진 무용이 될 수 있다니... 그것이 참 매력적이었다.



발란신은 고전발레에서의 춤의 테크닉은 받아들였지만, 고전발레의 드라마성이나 화려한 무대장치, 의상 등은 배제하고, 무용수들이 체조복 같은 미니멀한 의상을 걸치고 역시 미니멀한 무대에서 춤을 추게 해서, 순수한 무용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한다. 그림으로 치자면 추상화 같은 발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발레를 실제로 추상발레라고 한다고 한다. 그리고 에이프만은 발란신에게 바친 이 작품에서 그것을 이어받았다.



내용은 별로 복잡하지 않다. 발란신은 실제 생애에서 자신과 일한 여러 뛰어난 발레리나들과 차례로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데, 에이프만은 이 발레리나들이 발란신에게 예술적 영감을 준 뮤즈였으며, 이들과의 사랑과 실연으로 발란신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발전시켰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발란신이 세 명의 발레리나와 차례로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으로 되어있다. 첫번째의 당돌하고 요염한 무용수는 그를 이용하다가 다른 남자에게 끌려 떠나고 두번째의 청순한 무용수는 요절해서 그를 떠나며 세번째의 화려하고 당당한 무용수는 그의 사랑을 거절한다



솔직히 나는 현대무용이 그렇게 재미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그건 아무래도 화려한 무대와 의상이 없는 탓이라는 유치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이 공연이 그런 생각이 확실하게 깨주었다. 발란신이 자신이 사랑한 발레리나들과 선보이는 상당히 아크로바틱한, 그리고 관능적이면서도 절제된 2인무, 3인무, 그리고 발란신의 제자들이 보이는 역동적이고 힘이 넘치는 군무 등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순수하게 인간의 몸 만으로 저렇게 아름다움과 재미를 줄 수가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오래간만에 정말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예술의 전당을 나왔다. 생각해보면 레실피드-춘향-뮤자게트 로 이어진 프로그램 자체가 참 잘 짜였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뮤자게트" 언젠가 다시 무대에 오르면 꼭 다시 보러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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